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마 제국/역사 (문단 편집) ====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 로마 제국을 지키기 위해 밤낮없이 동분서주하던 갈리에누스였지만, 그의 단독통치기는 많은 이들의 반발을 샀다. 발레리아누스가 포로가 된 상황에서 갈리에누스는 아버지를 빼오려는 시도를 하지 않아 빈축을 샀고, 이는 제국 여기저기에서 반란, 독립 움직임으로 확산된 원인이 됐다. 결국 제국은 로마 제국, 갈리아 제국과 팔미라 제국이라는 3갈래로 쪼개졌다. 허나 갈리에누스는 제국 통합을 추진하면서도, 자신과 본인 가문, 극소수의 권세가 만을 위해 로마 제국의 근간을 뒤흔드는 정책을 잇달아 펼치고 편가르기를 하며 여러 사람들에게 욕을 먹었다. 그는 총독들의 반란을 막겠다며 로마 원로원 의원을 로마 군단에서 배제했다. 이어 계속된 국고 부담을 줄이기 위해 게르만족에게 국경수비의 일부를 부탁했다. 따라서 갈리에누스 휘하의 직업군인 출신 장군, 기병대장들까지 불만을 품었고, 이는 갈리에누스 치세 후반부터 반란과 토벌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상황을 초래했다. 결국 AD 268년 팔미라 제국의 제노비아가 이집트까지 점령하자 갈리에누스는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집트는 황제의 개인 영지이자 이탈리아가 수입하는 밀의 3분의 1 이상을 공급하던 주요 곡창지대였다. 때문에 이를 상실한 것은 갈리에누스의 가장 큰 실책이 되었고, 그나마 그를 따르던 일리리아 출신 기병대장들까지 갈리에누스에게서 등을 돌렸다. 하지만 갈리에누스는 여전히 자신과 아들들의 승계 작업에 집중하고, 본인 외가와 처가 같은 극소수 가문들에게 권력을 밀어줬다. 이는 원로원 의원들과 갈리에누스에게 소외된 본인의 친척들, 그를 따르던 일리리아 장교 집단이 합심해 갈리에누스를 없애겠다고 마음먹은 원인이 됐다. 따라서 아우레올루스가 총대를 매고 밀라노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갈리에누스는 그 반란을 거의 진압했음에도 로마 군단의 지지를 잃어버린 채 살해당했다. 갈리에누스를 제거한 진압군은 그 후임 황제로 기병대장이었던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를 추대했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이름에 붙은 고티쿠스는 고트족 출신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고트족과의 전쟁에서 큰 전공을 세워서 얻은 칭호였다. 갈리에누스가 살해됐다는 소식이 전달되자, 로마 원로원은 명령을 내려 갈리에누스의 막내아들과 아내를 처형하고, 갈리에누스 외가와 처가 식구들도 살해했다. 이때 갈리에누스의 이복동생 소 발레리아누스가 억울하게 함께 죽임을 당했다. 따라서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소 발레리아누스의 친모와 소 발레리아누스의 유가족들에 대한 보복을 금지했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갈리에누스가 추진한 개혁 중 문제가 많은 부분을 되돌리거나 손보면서, 원로원과 협력해 무너져가는 제국을 안정화하는데 주력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트족이 침공했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포로가 된 고트족 남자 중 젊고 건장하면 로마 군단에 편입시키고 나머지는 무장 해제 후 황폐화된 모이시아 속주에 정착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전임자인 갈리에누스가 단순히 알리마니족에게 라인강의 방어를 일임한 것과 달리 어디까지나 로마의 통제를 받는 범위내에서 정착을 허락한 것으로 정착할 토지를 얻은 고트족은 더이상 로마를 공격하지 않고 자신의 땅을 지키려고 자발적으로 싸우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뛰어난 정책에도 불구하고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자신은 재위 1년 반만에 전염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